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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충헌공묘갈명(忠獻公墓碣銘)
忠獻公墓碣銘 府君諱元吉字聖中一云太初號農隱系出玉川 曾祖諱璋 爲高麗檢校大將軍 祖諱洪珪 密直副使 贈奉翊大夫版圖判書考諱佺 生員文科 贈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妣馬韓國夫人潭陽田氏 府君生有異質 禀性忠亮 藝學早聞 篤志力行 向上學問 忠穆王二年乙酉登科官至檢校門下侍中 立朝剛毅有大節臨事不苟時稱王佐之材與鄭圃隱夢周偰芸亭長壽齊名 洪武二十二年己巳鄭圃隱偰芸亭成獨谷石璘等與公協謀廢辛昌立神宗七代孫定昌君瑤是爲恭讓王 王以公等撥亂反正弼成克復宗社功策勳第一賜爵大匡輔國光祿大夫推忠奮義翼戴弼成克復功臣玉川府院君及其晩節退隱于淳昌故里遠謝朝市厭薄權貴高臥田園頤養幽趣當時士君子有言曰趙侍中有裵相綠野之趣韓老晝錦之樂逍遙自適於農隱一窩而誰復知孤竹子志行靖節翁心事乎府君與牧隱圃隱陶隱冶隱同世一生素履亦有相符時稱爲五隱府君甞寄詩圃隱曰病耳不堪聞世事滿天明月一簑衣牧隱又與公詩曰演福鍾聲尚未鳴擁衾危坐度寒更一身衰病乾坤老萬象森羅日月明杵臼肯移存趙志華封空抱祝堯情悠悠今古無窮事惹起愁心作不平府君之道德勳業見於麗史及輿地誌東國名臣錄等書府君卒于洪武二十三年庚午八月日恭讓王遣禮官賜葬柳等面乾谷子坐原贈諡忠獻配郡夫人靈光金氏配郡夫人復興趙氏配郡夫人扶餘金氏墓皆祔焉有五男長曰瑛麗朝書雲觀副正我 太宗大王 徵以吏曹判書世子師傅召命不起靈光金氏出曰瑜麗朝典農寺副正我 太宗大王除漢城判尹不就復興趙氏 出曰瑾縣監曰琰節制都尉曰璛扶餘金氏出及我 太祖大王受禪而公之墓碑則埋于墓前當時事有所難言者盖忌諱故矣 崇禎紀元後再乙卯十月 日 十二世孫 通玫大夫前承旨命臣 謹撰墓表 世遠泐文不可辨後孫謀所以新之者 檀君紀元四千三百十二年己未十月 日 충헌공 묘갈명(忠獻公墓碣銘) 府君의 諱는 元吉이었고, 字는 聖中이었으며, 또는 太初라고도 칭하셨고, 號는 農隱이라 하셨다. 玉川人으로서 曾祖의 諱는 璋이신데 고려조 檢校大將軍이요, 祖의 諱는 洪珪이신데 密直副使로서, 奉翊大夫 版圖判書에 追贈되셨고, 考의 諱는 佺이신데 生員文科에 급제하여 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光祿大夫 玉川府院君에 追封되셨으며, 妣는 馬韓國夫人潭陽田氏이셨다. 府君은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資質이 있었고 타고난 天禀이 忠亮하셨으며, 文藝와 學名이 早年에 알려졌고, 두터운 뜻과 힘찬 實行으로 學問에 向上하셨다. 西紀一三六九年에 科擧에 급제하시어 벼슬이 檢校侍中에 이르렀으며, 國政에 참여하여 굳세고 과감하게 大節을 주장하셨고, 어려운 일을 당하였어도 구차함이 없었으므로 당시에 王佐의 資禀이 있다고 칭송되었으며, 鄭圃隱夢周와 偰芸亭長壽 등 여러 賢儒와 名聲을 나란히 하셨다. 西紀 一三八九年에 鄭圃隱 偰芸亭 成獨谷 石璘 등과 協謀하여 辛昌을 폐하고 神宗의 七代孫인 定昌君 瑤를 迎立하였으니, 이 분이 恭讓王이시다. 王은 公들이 亂을 除하고 宗廟와 社稷을 바로 잡았다는 공으로 一等勳인 大匡輔國光祿大夫推忠奮義翼戴弼成克復功臣 玉川府院君의 爵號를 封賜하셨다. 晚年에는 淳昌 故里에 隱退하여 世俗을 멀리하시며 權勢와 富貴를 싫어하시고, 田園에 休養하시니 당시 선비들이 이르기를 趙侍中은 裵相綠野의 志趣와 韓老晝錦의 樂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農隱이라는 작은 움집에서 逍遙自適하시니 누가 감히 孤竹子의 뜻과 절개를 지키는 心事인 줄 알겠는가. 府君은 牧隱 圃隱 陶隱 冶隱 등 諸賢과 한 時代에 태어나고 또한 履歷이 서로 부합하였으므로 世人들이 五隱이라 칭송하였다. 府君은 일찍이 圃隱에게 보낸 詩에서 「귀먹은 듯 人間事를 듣지 않으니, 달 밝은 시냇가에 도롱이 걸친 한 농부더라.」 하시니, 牧隱先生이 이를 보고 府君에게 詩를 써 보냈으니, 「연복사 종소리 아직 울리지 않았는데(演福鍾聲尚未鳴) 이불 끌어안고 앉아 추운 밤을 보내네(擁衾危坐度寒更) 이 몸은 늙어 병들고 천지도 늙어 가는데(一身衰病乾坤差) 삼라만상은 일월처럼 밝기만 하네(萬象森羅日月明) 저구는 기꺼이 조나라 보존할 마음 두고(杵臼肯移存趙志) 화봉의 백성은 공연히 요임금 축수하네(華封空抱祝堯情) 유유한 고금의 무궁한 일들이(悠悠今古無窮事) 수심을 자아내어 마음이 편치 못하누나(惹起愁心作不平)」 하였다. 府君의 道德과 勳業은 高麗史記와 輿地誌 혹은 東國名臣錄등에도 記載되어 있다. 府君은 西紀 一三九○年 八月에 별세하시니 恭讓王이 禮官을 보내어 致祭하고 柳等面 乾谷子坐原에 禮葬하게 하였으며 諡號를 忠獻이라고 贈하셨다. 配는 郡夫人 靈光金氏와 郡夫人 復興趙氏와 郡夫人 扶餘金氏인데, 모두 府君의 墓에 祔葬하였다. 五男中에 長은 瑛인데 麗朝書雲觀 副正으로 本朝 太宗大王께서 吏曹判書 世子師傅를 除授하여도 不就하셨으니 金氏의 所生이고, 다음은 瑜인데 麗朝 典農寺 副正으로 本朝 太宗大王께서 漢城判尹을 除授하셨으나 또한 不就하셨으니 趙氏 所生이고, 다음의 縣監 瑾과 節制都尉 琰과 學生 璛은 金氏所生이시다. 本朝 太祖大王이 王位에 오르자, 府君의 墓碑마저 墓前에 묻었으니, 당시에 말하기 어려운 拘碍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西紀 一七三五年十月 十二世孫 通政大夫 前承旨 命臣이 墓表를 지어 墓碑를 갖추었으나 어언 二百四十五年의 오랜 세월이 지나매 돌이 살고 文字가 희미하여 分別하기 어려우므로 후손들이 협의하여 새로 세우는 바이다. 檀紀四三一二年己未十月 日 다시 세우다. (本文註解説者 東潤) 註:※裵相綠野(배상록야) 중국 당나라의 재상인 裵度가 淮西의 亂을 평정하고 나자 그 공으로 晋國公에 피봉되었으며 벼슬은 中書令에 올랐으나 말년에는 고향인 河東에 은거하면서 보냈는데 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韓老晝錦(한로주금) 중국 송나라 인종 때의 재상인 韓琦는 賢相으로 유명한데 나중에 魏國公에 피봉되고 말년에는 지금의 河南省 安陽縣에 晝錦堂을 지어 놓고 여생을 보냈는데 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杵臼(저구) 절구공이와 절구통을 말하는데 이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귀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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